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루먼 독트린 (문단 편집) === 'Red Purge' === 유럽에서는 이렇게 급한 불을 껐지만 정작 [[동아시아]]에서는 위기감만 더욱 커져 갔다. [[중화민국]]이 단순히 밀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타이완 섬]]으로까지 쫓겨나 버린 것이다. 따라서 미국에게는 또 다른 거점이 필요했는데, 이 때 선택된 것이 바로 [[일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은 불과 몇년 전까지 주변국을 침략하고 미국과 전면전을 치른 추축국이었기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데다 체급상 일본만으로 소련과 공산화된 중국을 견제하기란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한반도]]에도 일정한 힘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전후로 소련의 간접통치 하에서 이후 이미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위한 작업을 독자적으로 밟아 나가고 있었고 여기에 자극받은 미국의 정책도 직접통치 하에서 점차 과격해져 갔다. 1946년 3월에는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고 잇달아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이 터졌다. 공산화 확산을 막는 것을 가장 큰 원칙으로 내세우던 [[미군정]]이 압박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일본에서도 [[GHQ]]는 우익 세력에 대한 견제를 위해 좌익 세력을 온존시키고 평화헌법 등을 통해 민주주의의 우선 도입을 주창했지만 국내외적으로 공산주의에 의한 압력이 강해지던 상황이었다.[* [[시모야마 사건]]을 비롯한 '철도 3대 사건'이 바로 이 시기에 터진 것이다.] 트루먼 독트린 이후 미국은 일본에서 기존의 전범 척결과 일본에 대한 민주화, 비군사화 정책을 위해 좌익 세력을 일정 부분 용인하거나 지원해왔던 기존 정책을 완전히 포기하고, 'Red Purge(빨갱이 숙청)'로 불리는 공직·군대로부터의 공산주의자의 색출과 퇴출 작업에 나서게 되며 사회주의 계통의 인사들은 탄압에 의해 지하화될 정도로 강한 압박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을 [[역코스 정책]]이라고 한다. 이후 한반도에 대한 단독 정부 수립 계획이 전면적으로 대두되게 되며 한국과 일본 두 국가는 '[[반공]]의 방파제'로서 육성된다. 다만 닥치고 반공만을 외치다 보니까 2차 대전에 책임이 있는 군국주의 극우 세력, 전쟁범죄자, 식민지 부역자들까지 당장 써먹을 수 있다는 이유로 대거 돌아오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쪽으로 가장 유명한 사례는 미국 본국의 [[매카시즘]]. 사실 동아시아에서 이랬으니 본토인 미국에서 더 심한 것은 당연했다. 어찌되었건 미국 본국에서도 공직에서 공산주의자가 대대적으로 색출되어 쫓겨나고 오히려 이것이 정치 도구로 이용되는 등 미국 정치사에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